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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를 책임질 큐레이터는 ‘광주 시내버스 첨단22번’이다. 서광주역 방향으로 향하는 노선에 느긋한 마음으로 몸을 싣고 차창 밖을 바라보면, 도심 속에 은밀하게 숨겨진 두 가지 색깔의 가을을 차례로 만날 수 있다. 덜컹거리는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가을볕을 쬐며 떠나는 가벼운 반나절의 여정. 첫 번째 목적지는 켜켜이 쌓인 시간이 고스란히 내려앉은 곳, 무양서원이다. ‘무양서원입구 정류장’에 내려 빼곡하게 들어선 현대적인 콘크리트 빌딩과 아파트 단지 사이로 난 좁은 길을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1927년에 지어진 옛 공간이 거짓말처럼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광주 문화유산자료 제3호로 지정된 무양서원(광산구 산월로21번길 26)이다.
이곳은 고려 인종 때 어의를 지낸 최사전을 비롯해 최윤덕, 최부, 유희춘, 나덕헌 등 다섯 명의 선현을 배향하고 있는 곳이다. ‘무양(武陽)’이라는 이름이 참으로 곱고 다정하게 다가온다. 광주의 옛 이름인 무진(武珍)의 첫 글자 ‘무’와 볕을 뜻하는 ‘양’을 합쳐 ‘광주의 볕’이라는 의미를 품었다. 그 따뜻하고 단단한 이름처럼, 가을날 무양서원 마당에 떨어지는 볕은 유독 부드럽고 온화하다.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지역의 정신을 지켜내기 위해 세워진 이 공간은, 가벼운 유행에 흔들리지 않는 특유의 단단함과 역사적 가치를 굳건히 지니고 있다.
무양서원의 가을은 이름난 명산들이 다투어 뽐내는 붉고 화려한 단풍놀이와는 그 궤를 달리한다. 오히려 묵직하고 고즈넉하며 흑백 사진처럼 담백하다. 유생들이 모여 학문을 닦던 강학 공간인 이택당을 중심으로, 성지재, 낙호재, 무양사로 이어지는 전통 건축물들은 시간의 결을 묵묵히 보여준다. 화려한 수식어보다는 담백한 문장으로 쓰인 산문 같은 장소다. 서원 주변을 에워싼 아름드리 거목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오래된 잎들을 바스락거리며 털어내고, 구불구불 부드럽게 이어지는 소박한 토담길은 연인들이 발을 맞춰 나란히 걷기에 더없이 훌륭한 무대가 된다.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면 어떤 각도에서도 한 폭의 정갈한 동양화가 완성된다. 화려한 관광지에 지친 타지역 관광객이나, 번잡한 생각들을 조용히 정리하고 싶은 홀로 여행자라면 낡은 마루 끝에 걸터앉아 잠시 스마트폰을 내려놓아도 좋겠다. 그저 고목 사이로 무수히 부서져 내리는 빛의 조각들을 가만히 응시해보자. 시간이 물드는 가을이 바로 이곳에 머물고 있다.
무양서원에서의 정적인 시간을 뒤로하고, 다시 현실의 정류장으로 돌아온다. 하차했던 정류장에서 서광주역 방향으로 가는 첨단22번 버스를 다시 기다린다. 다음 목적지를 향해 택시를 잡거나 낯선 정류장을 헤매며 환승 앱을 들여다볼 필요가 전혀 없다. 타고 왔던 버스에 다시 탑승하는 것만으로도, 여행은 마치 잘 쓰인 소설의 다음 챕터로 넘어가듯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이어진다.
다시 버스에 오르면 남부대, 전자공고, 보훈병원, 첨단휴먼시아를 차례로 거친다. 딱 다섯 정거장. 길지도 짧지도 않은 완벽하게 적당한 거리다. 버스가 정류장에 멈추고 문이 열릴 때마다 다양한 사람들의 일상이 차창 안으로 들어왔다 빠져나간다. 시장바구니를 든 노인, 이어폰을 낀 학생, 멍하니 창밖을 보는 직장인. 지나가는 도시의 일상적인 풍경들을 좌석에 깊숙이 기대어 느긋하게 감상하다 보면, 어느새 ‘신용초등학교’ 정류장에 도착했다는 안내 방송이 경쾌하게 흘러나온다. 여기서 하차 벨을 누르면, 아까 서원에서의 고요함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왁자지껄한 가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신용초등학교 정류장에 내려 스마트폰 지도를 슬쩍 참고하며 영산강변 쪽으로 조금만 걸음을 옮겨보자. 빽빽한 도심의 풍경이 걷히고, 탁 트인 넓은 하늘과 은빛으로 윤슬을 반짝이는 강물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이번 목적지는 광주 북구 신용동 368번지 일대, 영산강변에 널찍하게 자리한 ‘거징이 쉼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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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양서원이 오래된 나무와 흙돌담이 빚어내는 차분하고 내밀한 가을이었다면, 거징이 쉼터는 넓은 영산강과 수많은 꽃이 뿜어내는 생동감 넘치는 외향적인 가을이다. 공간의 성격이 180도 바뀐다. 이곳의 진짜 주인공은 강변을 따라 끝없이 부드럽게 이어지는 쾌적한 산책로와 자전거길, 그리고 그 길을 흐드러지게 장식하는 코스모스다.
쉼터라는 이름에 걸맞게 단순히 눈으로만 보고 스쳐 가는 전시장이 아니다. 직접 걷고 숨 쉬며 만끽하는 거대한 야외 정원이다. 가을이 깊어지면 영산강변은 거대한 코스모스 군락지로 눈부시게 변모한다. 영산강의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수만 송이의 코스모스가 일제히 이리저리 흔들리는 풍경은, 그 자체로 거대한 분홍빛과 하얀빛의 파도를 연상케 한다. 코스모스 군락을 곁에 두고 산책로를 걷다 보면 주말을 맞은 도시의 건강한 생기를 온몸으로 흡수할 수 있다. 꺄르르 웃으며 뛰어가는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나온 젊은 부부들, 돗자리를 펴고 앉아 서로의 환한 얼굴을 카메라 렌즈에 담아주며 웃음을 터뜨리는 친구들, 바람을 매끄럽게 가르며 시원하게 페달을 밟는 자전거 여행자들로 활기가 가득 넘친다. 무양서원에서 한없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던 마음이 거징이 쉼터의 탁 트인 풍경 속에서 기분 좋게, 그리고 아주 건강하게 들뜬다. 화사한 꽃으로 물드는 가을의 한가운데를 걷고 있음을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하게 실감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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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이 유독 부드럽다면 거창한 계획은 잠시 미뤄두어도 좋다. 평소 좋아하던 커피 한 잔을 테이크아웃 잔에 담아 들고 가까운 버스 정류장으로 향해보자. 버스 창가 자리에 앉아 좋아하는 플레이리스트의 볼륨을 조금 높이면, 우리가 매일 스쳐 지나가던 광주의 평범한 풍경들이 전혀 다른 질감의 아름다움으로 다가올 것이다. 서원의 단정한 마루 끝에서, 혹은 영산강변 산책로 위에서 맞이하게 될 당신만의 새로운 가을을 기꺼이 환대하시길 바란다. 주말의 오후는 길고, 우리 동네가 숨겨둔 매력은 아직 무궁무진하다.
정지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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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01 (목) 2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