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병고(病苦)에 시달리던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 그 친구는 작년 말까지만 해도 가끔 나에게 전화를 했고, 한 번 전화하면 40-50분씩 계속 통화를 했기에 귀찮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차츰 그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친구는 암 수술 후 요양병원에 입원했는데, “처음에는 자주 찾아오던 가족들이 이제는…2024-06-24 20:09

고뫼 마을 경로당에 자칭 타짜 모였다 바닥에 엎디어진 패 하나씩 까뒤집어 차례 먼저 정하고 오늘은 홍단이든 청단이든 기언치 해 볼 요량으로 각오가 비장하다 마치 한 살림 거덜 낼 노름꾼처럼 아침까지 아프던 폴뚝은 가벼이 개안허고 복대 찬 허리는 암시랑토 안해 끌러불고 구리 동전 하나에 고기압과…2024-06-24 20:09

사과를 깎다가 손을 베었다. 대단찮은 상처라서 금방 피가 멎었는데 핏자국을 닦노라 물을 채운 그릇에 손을 담그자 다시 피가 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실오라기처럼 가늘게 흐르다가 물과 섞이면서 좀 더 엷고 부드럽게 퍼져 나가며 점차 물을 분홍빛으로 물들여 가는 과정이 하도 은근하고 아름다워 지혈할 생각도 잊고 …2024-06-10 20:18

달빛 어리는 멀구슬꽃향기를 듣다 초여름밤 산책은 아득아득하다 어디서 이 몸과 마음을 사로잡혔었나 먼 바다 그 섬의 그리운 빗돌 곁 너는 노래했고 나는 춤 출 수 없었다 아득아득한 멀구슬꽃향기가 들린다 유월이면 도지는 병 분명 유월이다 너는 로버트 번즈, 붉은 장미를 읽고 나는 보릿대 들불 연기만 바라…2024-06-10 20:18

고적한 고향 집 대문 열고 들어서면 매혹적인 향기로 맞아주는 하얀 미소 눈부신 햇살 받아 별빛처럼 소곤소곤 작은 목소리로 전해오는 다정한 인사 단정한 쪽머리 고운 자태로 마루에 앉아 미소 짓던 어머니 그 따스한 품속같이 유년의 추억 아련히 불러와 그리움 한 다발 가슴에 안긴다 ▲‘순…2024-06-10 20:18

나무가 되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일 년에 한 번씩 죽어가는 풀이 아니라 내 이름을 걸고 뺨 붉은 사과처럼 멋진 열매를 맺고 세상 첫날에서 마지막 날까지 죽지 않는 나무가 되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보고 풀이라 해도 스스로 키 작은 나무였으니 나무도 풀도 결국은 한 뿌리였지 않았던가 …2024-06-10 20:18

석양녘 산 그늘 마을로 내려앉으면 비워둔 자리마다 총총 이는 별 초승달이 황금을 물고 떠나가고 있다 쑥물 묻은 기침소리 초가삼간에 내리고 그림자는 무처럼 자라 발목까지 찬바람으로 차오른다 구름도 쉬어가는 산속 마을 차 한잔 기울이고 뒤돌아보면 하나 둘 별들은 새가 되어 들녘으로 떠나간다 바…2024-05-27 18:18

엄마 뾰족구두엔 딱따구리가 사나 봐 걸을 때도 딱 딱 딱 달릴 때도 딱 딱 딱 우리 엄마 구두는 딱따구리가 사는 작은 나무 같아요 ▲1995년 문학춘추 아동문학 신인상 ▲문학춘추작가회 부회장 ▲광주전남아동문학인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사무차장2024-05-27 18:18

지난 삼 년 동안 코로나19로 인해 빗장을 걸어 잠근 마음이 사람을 찾아 문학기행에 선뜻 나섰다. 안면이 있는 이를 만나도 반가워서 다가서기보다는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는 나를 느낀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인지 반가움에 악수하거나 껴안지를 않고 마스크 쓴 채로 눈인사가 서먹하다. 어쩜 처음부터 예상된 일이긴 …2024-05-27 18:18

여름철에는 콩물국수 한 그릇 엄지 척이다 열무김치와 곁들인 콩물 더위 피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피서 전략 있을까? 풍미 더할 볶은 땅콩 깨를 슬쩍 걸쭉하고 묽은 사랑 한 스푼 밭에서 나는 쇠고기다 단백질을 충전하는 여름살이 이보다 더한 처방 있을까? 어머니는 콩물 레시피 나의 살과 뼈를 …2024-05-27 18:18

꽃잎이 여기저기 휘날려 내 머리에 앉고 내 볼을 어루만지어 길거리에 흩뿌렸는데 이 봄날 이런 일을 겪게 되니 참으로 봄날이 외롭지만 않아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구나 삶을 살아가는데 이런 봄날에 떨어지는 꽃잎과 우연치 못하게 조우를 하게 되어 봄은 그냥 봄이 아니라 꽃은 그냥 지는 게 아니라 …2024-05-13 17:06

밝음과 어둠이 교차 되는 시간에 음이온이 가장 많이 나온다고 한다. 그 말이 정답인지 모르지만 어느 누구도 틀렸다고 하지 않으니 그 말마따나 나는 가끔 오후에 무등산에 오른다. 자연과 호흡하며 걷는 걸음은 숲에서의 신선한 바람 따라 마음의 빗장이 활짝 열린다. 날짜와 장소를 맞춰 친구와 함께 오르는 것보다…2024-05-13 17:06

그해 여름 겨우 일곱 살 나의 전부였던, 내 영혼보다 맑은 그 눈빛 내 여린 두 발 냉기 어린 물 처음 담그러 가는 날 낮은 바람 부는 곳으로 아버지 등에 업혀 흥에 겨워 가는 그 소리 지금도 그리움으로 그늘로 봄꽃으로 아직도 기억 사이사이로 울려 퍼지는, 사랑한다 사랑한다 그 음성 처음이자 마지막인 천둥…2024-05-13 17:06

난치병 어린이를 돕는다고 매달 성금 얼마씩 엄마가 자동이체 ‘친구야, 꼭 나아야 해!’ 내 간절한 마음도 다달이 함께 자동이체. ▲1991년 아동문예 등단 ▲동시집 : ‘비디오 판독 중’ 외 ▲한국아동문학상, 오늘의동시문학상, 송순문학상 수상 ▲한국문협작가상, 한국동시문학상 등 수상 ▲…2024-05-13 17:06

아빠가 밥상 새우젓갈 보고 이거 아버님이 참 좋아하셨는데 엄마가 손가락 반지 보며 이거 어머님이 주셨는데 아빠는 새우젓에 할아버지 보고 싶고 엄마는 손가락 반지에 외할머니 그립단다 그건, 나도 그래 깜박 잊은 숙제에 선생님 꾸지람 귀찮은 이 닦기에 엄마 잔소리 생각나거든 하지만 보고 싶고 그립…2024-04-29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