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촉촉히 내리고 연일 산안개 자욱자욱 일어 숲속을 더듬고 가더니 온산이 울긋불긋 물들고 있습니다 철없던 시절엔 환호하며 아름답다 했던 단풍이 삶의 끝자락에 서고 보니 애잔한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끝내 물들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나뭇잎들이 애처롭고 힘없이 떨어져가는 낙엽의 통곡소리 …2018-05-07 18:38

좋은 시는 군살을 빼야 이루어진다. 오늘도 당신을 그리며 시를 쓰지만 응답이 없는 걸 보면 아직도 엉터리 퇴고(推敲)를 하는가 보다. 군살빼기도 감동주기도. 나는 언제 쯤 당신이 꼭 껴안아 줄 그런 시 한 편을 남길 수 있을까. 시는 간결하고 명료한 문학장르다. 미니스커트처럼 짧아야 미학적 생동감…2018-04-23 19:42

어미에게서 태를 자르고 쉰하고 넷 꽉 진 두손을 펴버리면 어떡하나 두 손 가득한 나의 것들 혹여 내 것을 네가 탐할까 혹여 내 것이 사라져버릴까 두려움에 잠 못 들었던 날들 쉰하고 네 번의 태양이 지는 날 내 코를 후벼 파는 썩는 냄새 더 이상 아무 것도 잡을 수 없는 꽉 쥐어져 있는 …2018-04-23 19:42

금잔디 꽃들의 궁전 꽃무더기 궁전에서 푸른 꿈을 키운다 달팽이 산언덕을 감고 올라 소망을 상달하는 하늘정원 사랑의 꿈나무를 심는다 구름도 집을 짓고 머 언 그리움을 끌고 와 노을 끝에 달아놓는다 아련한 추억의 그리움 푸른 잔디에서 노을을 붙잡고 황혼은 마주하고 서있다 순천정원박람회의…2018-04-23 19:42

봄 햇살이 살가운 날 집안 정리를 해보려고 장롱 문을 열었다. 다져져서 무거워진 목화솜이불이 한눈에 들어온다. “어떻게 하지?” 이 이상 더 좋을 데 없는 순식물성 재질의 이불이건만, 지금 주거생활에는 활용도가 떨어진 장롱지킴이기에 어머니께 무한히 송구스럽다. 지난날 막내딸을 시집보내며 당신의 정성을 죄다 쏟…2018-04-23 19:42

눈빛에는 온도가 있다. 어떤 말로 설명하지 못할 인간의 본능을 말해주는 수많은 것들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 눈빛이다. 그 중에도 가장 보고 싶지 않는 것이 있다면 슬픔을 견디는 어머니의 눈빛이 아닐까? 병실에 들어설 때 어머니와 눈이 마주치면 메마른 눈빛에 생기가 돈다. 기다림 끝에 나타난 딸이 너무도 반가…2018-04-09 19:07

달꽃 여윈 호수에 멍울 진 사연 가슴 한구석에 긁힌 외로움 무너져 내린 야속한 이별이 섧다 켜켜이 쌓인 눈발 고즈넉한 순백의 꽃결 쓸려간 세월 그리움을 건져라 산화한 동백 시인은 막걸리를 마신다 비상하라 백안작의 날갯짓 술은 시인과 늘 가까운 벗이었다. 시인 이백이 얼큰하게 취…2018-04-09 19:07

호리고 사로잡아 뇌쇄시키는 무르익은 깡패 저잣거리 왕초가 홍도화(紅桃花)다 망울은 알토란처럼 다부진 구슬이고 겹꽃잎은 슬프게 탐스런 함박꽃이다 두루 다 주지는 않는 조물주 뿔을 주면 이빨을 빼고 날개를 주면 발 둘만 주는 게 그의 뜻이라지만 홍도에겐 복숭아 없는 아름다운 반신불수가 분명…2018-04-09 19:07

이 가을, 감나무와 마주한 모과나무 늠연하다 사방으로 가지를 뻗치는 모과나무 속살 드러낸 감나무 앞에 서슬 세운다 그 가늘디가는 가지에도 황금 열매 주렁주렁 울퉁불퉁 못생겼다 감잎들의 수런거림에도 당당한 모습은 단감과도 비길 바가 없는 청량한 향기로움이 있기에 그 봄날, 다복한 연분홍 …2018-04-09 19:07

창문 너머엔 온통 푸른 세상이다. 하늘에는 하얀 꽃구름이 둥둥 떠다닌다. 무엇을 사랑할까? 보들레르처럼 나도 구름을 사랑한지도 모르겠다. “오동꽃 피었지?” 쇠약한 몸과는 달리 어머니의 음성은 맑다. 하기야 어머닌 목소리만큼은 젊었을 때부터 맑고 투명했다. 조단조단 이야기를 하면 참 듣기가 편안하…2018-03-26 19:32

까투리 둥지 튼 곳 억새 국을 찾아 간다. 서걱이는 그 잎 잎들 달래어 매만질 때 역겨운 생의 설움 밀려와 열광하는 불바다 산은 자연의 품이라 할 수 있다. 그 안에 다양한 생명들의 몸짓이 꿈틀댄다. 카투리가 둥지를 틀고 억새국이 고운 꽃잎을 드리우고 있다. 그 생명의 축제를 바라보다 보면 생의 추억…2018-03-26 19:32

비실비실 말라가는 마늘 한 쪽 유리컵에 담아 물을 부어준다 하루가 다르게 기운을 찾더니 물 속으로 발 뿌리를 쭉쭉 뻗는다 다친 마음의 사이를 비집고 파릇하게 새 순이 돋아 나 꼭 앞산 봉오리 같다 엄지 만 한 몸뚱이가 푸른 산을 이고도 까딱없다. 시는 발견의 미학이다. 말라가는 마늘은…2018-03-26 19:32

무더위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한낮 나무가 알아보는 사람이 나무를 말할 수 있을까 나무가 외로이 하늘만 바라볼 때 나는 무심코 나무와 하늘 사이에 있었다 세월에 들린 바람만 공연히 가지 끝에 와 응석을 부리다 투정만 늘어놓고 갔다 거미줄에 채인 몇 종의 날개들이 술렁거렸다 착하게 눈 뜨…2018-03-26 19:32

미국의 사회학자 오그번(W.F. Ogburn)은 현대인들이 급속히 발전하는 물질문명을 따라가지 못하는 현상을 문화지체(文化遲滯, cultural lag)라고 불렀다. 그런데 아내가 자주 나에게 “뚬벙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나도 ‘문화지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자백하지 않을 수 없다.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2018-03-05 19:12

해질 무렵 도착한 조그마한 상자 하나 겨울 산을 넘어서 천릿길을 달렸어도 하루가 따뜻해지는 어머니의 겨울 안부 두 손으로 만지자 파도소리 들려오고 남녘의 봄 향기로 깊어가는 저녁 한때 퍼붓던 눈발도 잠시 도란도란 환해진다. 겨울은 우리의 마음을 외딴 섬처럼 쓸쓸하게 만든다. 흐린 하늘과 삭풍으로…2018-03-05 1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