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에 넘실대는 구월 햇살이 무척이나 밝다. 방안의 짙은 갈색 커튼을 내린다. 병원 나이트를 하고 아침이 돼서야 돌아온 딸은 밥숟갈을 놓자마자 침대에 눕는다. 잠든 딸애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창백하게 누워 있는 딸은 잠을 자고 있다기보다는 혼절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목까지 길게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2019-02-11 19:07

무더위 숨 죽이며 장맛비 그치던 날 여름내 끈적이던 골방 먼지를 털어낸다 매번 쓸어내지 못하고 자리만 뒤바꾸며 품에 안고 있는 것들 오래 된 맞춤법의 곰팡내 나는 책이며 잉크마저 말라버린 만년필과 낙서로 남아 있는 휴지 같은 종이들 주머니 속 과거를 만지작거리며 옷깃에 맴도는 낭만을 여미듯 떨…2019-02-11 19:07

한재골 가는길 호수 지나 메밀꽃 필무렵 산허리춤 감고 돌아 뒤뚱거린 오리 걸음마 가픈 숨 차오르게 감춰진 곳 497 정원카페 등 굽은 소나무 한그루 최후 사구칠 지킴이로 남아 가문의 효자 소나무 햇볕 꼭 붙들고 넉살좋은 미소로 자네도 497 려고 여기 왔는가 반긴다 겨울 산이란 산끼리 응등…2019-02-11 19:07

앓는 이 뽑지 못하고 지새는 밤 상처는 더욱 쑤석거리면서 기승을 부린다 어둠발은 홑이불처럼 덮혀 어머니의 약손처럼 자거라 자거라 다독거리지만 고슴도치의 털처럼 쭈삣쭈삣 곤두서는 촉수로 이 밤 건너고 있는가 쓰디쓰게 정신의 뿌리까지 젖어드는 아메리카노 커피처럼 맛깔나는 상처 어둠과 한 합이…2019-02-11 19:07

‘창조의 빛 미래의 빛’이란 슬로건 아래 2015년 7월 4일 광주에서 U대회가 개막되었다. 28세의 나이 제한을 두고 미래의 주역들이 모여 스포츠 행사를 뛰어넘는 세계청소년 우정의 축제장이다. 아름다운 사물놀이와 우아한 구성놀이, 화려한 불꽃놀이 속에 3시간동안 개막식이 진행되었다. 서쪽에 있던 성화는 처음 …2019-01-21 18:39

남들은 충장로를 가는데 나는 무등산엘 갔다 향암촌 골짜기 충민사 아래 불법으로 친 텐트 속에 모기향 피워놓고 몸을 숨긴 채 내가 기다리는 것은 여인이 아니었다 김덕령 전상의 송제민 같은 충신을 보는 것이다 아직 그들의 시간은 말없이 흐르고 계곡 깊은 곳에 서릿발같은 호령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고 그…2019-01-21 18:39

꽃병에서 떨어진 마른 꽃잎은 이미 끊어진지 오래된 인연처럼 부서진다 날이 갈수록 고요처럼 바랜 울음의 흔적들 무리지어 흐르는 푸른 안개 속에 겁도 없이 피어오른 나이든 꽃이 지난 시간 속을 헤집으며 한 때 마음이 꽂혀 제 몸 다 태워 버린 이야기를 쏟아낸다 제자리에 머물지도 못하는 꽃이 지고 다…2019-01-21 18:39

오늘도 춤을 춘다 한을 토한다 우리의 가락에 실어 거리의 거렁뱅이 예술인으로 승화된 풍자와 해학의 극치 말의 짜집기인가 다다이즘인가 직설과 욕짓거리 독설의 파라다이스(paradais) 외면 속에 살아온 생존의 몸부림 카타르시스(katharsis)를 만끽하는 현대인 누구를 위한 절규였기에 쓰레기 …2019-01-21 18:39

바람이 도란도란 놀다가는 달래산 자락에 멧새가 날아옵니다. 멧새 두 마리는 두리번거리더니 산자락 끝까지 샅샅이 살피고 다닙니다. 이윽고 멧새 한 마리가 기분좋게 외칩니다. “옳거니! 우리 이곳에다 둥지를 틉시다.” 알고 보니 멧새는 부부입니다. 그동안 보금자리를 찾느라 땀을 뻘뻘 흘렸나 봅니다. 서로 …2019-01-07 18:36

새해 첫날 무등산에 올라 거룩한 불의 탄생을 보았다. 묵은 기억을 살라내는 찬란한 빛이었다. 희망의 새벽을 여는 눈부신 창이었다. 건강한 행복을 꿈꾸는 거룩한 의식이었다. 그 붉은 우주의 기운 가슴에 강물처럼 담아 온 누리에 선물처럼 나누어 주고 싶다. 파란 하늘에도 너른 바다에도 너…2019-01-07 18:36

우리 잊혀져간 이름들 가을 강물에 띄워 부르면 갈대처럼 스러진 얼굴들이 푸석푸석 일어설 것 같다 가느다란 허리 감고 말없이 살아온 세월의 강줄기처럼 파아랗게 미소 지으며 다가올 것 같다 바람처럼 떠돌며 살아온 질긴 삶의 매듭 바싹 마른 가슴 열고 가을 강물에 발을 담그면 희미한 이름들이 수…2019-01-07 18:36

풀어도 풀어도 줄줄줄 나오는 내 코는 고장 난 수도꼭지 젖은 수건도 번개처럼 말려주는 내 몸은 난로 의사선생님도 이기는 넌 정말 무서운 아이 독감에 걸린 아이는 고열과 두통, 콧물이 줄줄 나온다. 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은 한없이 안쓰럽고 짠하다. 밤새 잠못 이루고 간호하며 하루 빨리 낫기…2019-01-07 18:36

까숙이는 자기보다 조금 늦게 태어난 장돌이를 평소에 동생처럼 돌봐 주었다. 친구와 싸울 때 불리해지면 그를 뜯어 말려 안전한 자리로 피신시켜주었다. 주인이 밥을 그릇에 부어주면 서로 먼저 먹으려고 밀칠 때 까숙이는 장돌이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기도 했다. 주인이 망사 자루를 가지고 들어왔다. 꿩들은 잡히…2018-12-10 18:36

돌아가고 싶었네 그 하얀 손톱 바래고 일상이 퇴적하다 쌓인 황혼숲 한줄기 바람으로 옛나루 목화동에 닿고 싶었네 으스름 달 아래 엎드려 풀숲 짙은 소리 피어문 꽃식구들 초록문 열어 순은으로 피어나라 거울보다 맑은 고향 그리워 내 무수히 찢겨버린 세월 한 구석 어린 암소를 몰고가던 그 농업학교 언덕 솔…2018-12-10 18:36

노오란 은행잎 발길에 채여 아름다이 흐느낍니다 산비탈 한 자락에서 불현듯 일어오는 쌀살한 가을바람 찾는 이 없는 길섶에 이리저리 뒤척이며 시간만을 헤이는 버려진 말들 울창한 신록의 노래로 하여 뚜룩뚜룩 알찬 결실의 한 수확은 선연한 심장의 판막을 늘어지게 하였고 다한 순환의 끝점에 떨어졌으나…2018-12-10 18: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