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사 천왕문을 통해 본 일주문이 액자 속 그림같다.

다산 정약용 남도유배길 3코스가 시작되는 달맞이마을에 도착하니 450년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나그네를 맞이한다. 달맞이마을은 아기자기한 바위봉우리들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어 포근하면서도 아름답다. 농로를 따라 거는데 겨우내 숨죽여 지냈던 풀들이 앞다퉈 대지를 뚫고 올라와 재롱을 부린다. 농로는 송월저수지로 이어지고, 저수지 너머로 월출산 구정봉·향로봉 같은 아기자기한 바위봉우리들이 연꽃처럼 피어있다.

월송마을에서 작은 고개를 넘으니 월출산이 가깝다. 병풍처럼 펼쳐지는 월출산의 바위봉우리들이 거대한 조각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땅을 갈아엎어놓은 논밭이 올 농사가 시작됐음을 알려준다. 하천 둑을 따라 걷는데 갈대 너머에서 바위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봄을 기다린 농경지 뒤로 월하리 마을이 둥지를 틀고 있고, 마을 뒤에는 무위사가 자리를 잡았다. 월하리를 지나 무위사 입구에 도착하니 활짝 핀 매화가 나그네를 부처의 세계로 인도한다.

국보 제13호 무위사 극락보전, 고려시대 건축양식을 한 조선초기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보제루를 통과해 다시 한 계단 올라서니 넓은 마당 뒤로 극락보전(국보 제13호)이 단아하게 앉아 있다. 극락보전은 맞배지붕 겹처마에 주심포 건물로 세종 12년(1430)에 지어졌지만 고려시대 건물인 수덕사 대웅전이나 부석사 조사당을 닮았다. 고려시대 건축양식을 한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극락보전 안에는 아미타여래삼존좌상(보물 제1312호)이 모셔져 있고, 그 뒤편 벽에 역시 아미타삼존도(보물 제1313호)가 그려져 있다. 이 삼존불좌상은 고려후기의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조선 초기 불상의 특징이 가미된 과도기적인 작품이다. 아미타삼존불 벽화 뒷면에는 떠가는 듯 일렁이는 파도 위에서 연잎을 타고 서 있는 관음보살이 그려진 수월관음도(보물 제1314호)가 있다.

무위사는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미륵전, 종무소, 성보박물관, 나한전, 산신각 같은 당우들이 넓은 마당을 감싸고 있다. 규모도 적고 소박한 절이었는데, 수차례의 중창불사로 이제는 제법 규모가 있는 사찰이 됐다.

백운동정원은 백운동계곡 물을 끌어들여 초당 앞으로 돌아가게 만들어 시원하면서도 운치를 더한다.

천왕문을 나서니 오른쪽으로 보이는 산줄기들이 리듬감 있게 흘러내리고, 왼쪽에서는 월출산 바위봉우리들이 살짝 고개를 내밀면서 배웅을 해준다. 무위사를 나서면서 무위(無爲)를 생각한다. 억지로 도모하지 않는 것, 하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안 하는 것이 없는 경지가 바로 무위 아닐까?

월출산 자락을 따라 걷는데 월출산 품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안운마을길을 걷는데 흙돌담이 정감을 자아낸다. ‘백운첩과 백운동 12경’이라 쓰인 안내판이 나를 백운동정원으로 안내한다.

다산초당에서 귀양생활을 하고 있던 다산선생은 1812년 제자들과 함께 월출산을 등반하고 이곳 백운동 별서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백운동정원의 아름다움에 반한 다산선생은 초의선사에게 ‘백운동도’를 그리게 하고, 백운동 원림 12승경을 노래한 시문을 남겼다. 백운동도와 시문을 엮어 책으로 만든 것이 ‘백운첩’이다.

백운동정원은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폐허가 돼 원형을 잃어버렸으나 ‘백운첩’에 있는 ‘백운동도’를 근거로 유서 깊은 전통별서의 모습을 재현하게 됐다. 백운동정원은 담양 소쇄원, 완도 보길도 세연정 등과 함께 호남 3대 정원으로 일컬어지는, 조선중기 선비들의 은거문화를 알려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월출산의 수려한 풍경과 어울린 강진다원 녹차밭.

백운동정원으로 가는 길은 짧지만 동백숲이 고즈넉하다. 다산선생은 백운동정원으로 가는 이 동백숲길을 산다경(山茶徑)이라 했다.

마침 빨갛게 핀 동백이 처연한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조그마한 계곡에서는 물소리가 들릴 듯 말 듯 청아한 소리를 내고, 담벼락 안쪽의 별서정원은 고요하기만 하다. 대문을 통해 백운동정원으로 들어가니 초가 두 채가 나그네를 맞이한다. 무엇보다도 눈길을 끄는 것은 백운동계곡의 물을 끌어들여 초당 앞을 돌아가게 만든 유상곡수(流觴曲水)다.

담양 소쇄원은 자연 계곡을 위에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건물을 앉혔지만, 백운동정원에서는 바로 옆 백운동계곡에서 물을 끌어와 아기자기하게 물길을 만들었다. 유상곡수에는 물이 잠시 머물다 갈 수 있도록 초당 옆과 앞에 사각형의 작은 연못 두 개를 만들어 놓았다.

백운동정원을 지나자 드넓은 녹차밭이 펼쳐진다. 나는 녹차밭을 바라보며 드넓은 면적에 놀라고, 빼어난 월출산의 풍경과 어울린 수려한 풍경에 다시 한 번 놀란다. 하늘을 찌를 듯이 뾰족뾰족 솟은 바위 봉우리들이 늠름한 남자의 기상이라면, 넓고 부드럽게 펼쳐지는 녹차밭은 어머니의 넉넉한 품이다.

일교차가 심하고 안개가 많은 월출산 자락은 녹차를 재배하기에 적합한 기후조건을 갖추고 있어 떫은 맛이 적고 향이 좋은 재래종 녹차가 자생했었다. 녹차를 재배하기에 적합한 지리적, 인문적 조건을 갖춘 이곳에 1982년 약 10만 평에 이르는 녹차밭을 조성했다.

금릉경포대계곡 하류인 월남리에는 월남사라고 하는 큰 절이 있었다.

고려시대에 창건된 월남사는 조선후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절터로만 남아 있는 월남사지에는 백제 양식인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닮은 삼층석탑(보물 제298호)이 늘씬하고 우아한 풍모를 하고 서 있다. 월남사는 병풍처럼 펼쳐지는 월출산의 빼어난 봉우리들이 가장 아름답고 편안하게 배경이 돼 준다. 비록 절은 없어지고 삼층석탑과 근래에 지은 종무소 한 채가 고작이지만 여느 거찰에서보다도 부처의 향기가 진하게 배어나온다.

이어 남도유배길은 강진에서 영암으로 가는 13번 국도 옆 농로를 따라가다가 신월마을로 방향을 튼다. 마을 안쪽 좁은 골짜기에는 작은 농경지가 있고, 그 뒤로 사자봉 등 월출산 북동쪽 바위 봉우리들이 송곳처럼 솟아 있다.

농로를 지나 누릿재로 가는 숲길로 접어드니 새소리, 바람소리만 들려올 뿐 고요하기 그지없다.

누릿재에 올라선다. 강진과 해남의 선비들이 한양에서 과거를 보기 위해서 누릿재를 넘었고, 강진·해남·완도나 제주도로 유배를 가던 선비들도 이 고개를 넘어야했다. 바다에서 나는 해산물을 팔러 가던 보부상도 넘고, 영암장이나 강진장을 보러가던 이 지역 주민들도 개나리봇짐 짊어지고 넘었던 고개다.

누릿재를 넘으면 영암 땅이다. 다산 정약용 남도유배길이 끝나는 천황사 입구에서 바라본 월출산은 여전히 아름답고 신비롭다. 유배 가던 다산선생도 저 월출산의 빼어난 자태를 보면서 마음의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산천은 의구(依舊)한데, 인걸(人傑)은 간데없네.’


※여행쪽지

▶ 다산 정약용 남도유배길 3코스는 강진군 성전면 달맞이마을(대월리)에서 시작하여 월송리→무위사→백운동정원→강진다원→월남리→신월마을→누릿재→천황사 입구까지 16.6㎞로 5시간 정도 걸린다.

▶ 가는 길 : 광주→1번 국도→동수교차로에서 영암 방향으로 13번 국도→영암→성전면소재지 1㎞ 전방에서 우회전→달맞이마을(대월리)

▶ 대중교통 : 강진 성전에서 무위사 가는 군내버스가 하루 3회(08:50, 10:40, 16:20) 있다. 대월리 하차. 10분 소요. 버스시간 맞추기가 힘들면 성전터미널에서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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